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FA 제도 (문단 편집) == 시초 == ||[[파일:external/i.lv3.hbo.com/the-curious-case-of-curt-flood-1024.jpg|width=100%]]|| || FA제도 탄생의 단초를 제공했던 커트 플러드 || 1970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 간의 트레이드를 통해 중심선수이던 [[커트 플루드]]가 필리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보복이 아닌 팀 보강 차원에서 이뤄진 트레이드이기 때문에 물론 다른 선수들도 포함되었지만 본 문서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기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에 대해 커트 플러드는 12년 간 가족들이 살고 있는 세인트루이스에서 필라델피아로의 급격한 이전과 필리스의 노후한 홈구장[* 베테랑스 스타디움은 1971년에 개장했다. 그 이전에 썼던 구장은 샤이브 파크(Shibe Park).], 인종차별적 팬[* 플러드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필리스의 거포 3루수 [[딕 앨런]]부터가 필라델피아 팬들의 인종차별적 욕설과 야유에 질릴대로 질린 상태였다.]을 들어 트레이드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1922년]]의 연방대법원 판결인 '프로야구는 독과점금지법을 적용받지 않는다'로 선수는 트레이드를 거부할 권리가 없는 상황이었고, 커트 플러드는 이에 대해 커미셔너를 상대로 비인간적 처사라는 이유로 법적 소송을 제기하였다. 선수노조는 이에 대해 호응하였으나, 은퇴선수를 제외하고서는 현역선수는 불이익을 이유로 법정에서 아무도 증언하지 않았다. 연방대법원은 [[1972년]], [[1922년]] 판결을 재확인하면서 구단과 사무국의 승소를 선언했다. 커트 플러드는 1970년 시즌은 포기하였고[* 9만 달러의 연봉을 받으면서 400만 달러의 소송비용을 썼다.], 1971년에 다시 트레이드 돼서 13경기에만 출전한 이후로 은퇴하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허사가 아니었으며, 선수노조위원장인 [[마빈 밀러]]의 노력으로 [[캣피시 헌터]], [[앤디 메서스미스]], [[데이브 맥널리]]에 대한 '사이츠의 결정' 등으로 메이저리그에서 6년을 뛴 선수는 자유계약을 할 수 있다는 FA 권리가 생겨났다. 이후 MLBPA(선수노조)의 구단 및 사무국과 협상으로 현재의 FA 제도, [[연봉조정]] 제도가 생기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98년 반독점금지법에 프로야구를 포함시키는 법이 제정됨으로서 선수의 권한은 확대되었고, 이 법은 '커트 플러드 법'으로 명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